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인간으로 태어나서 생명의 문을 닫고 자살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윤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불법의 입장이다.
불생(不生)의 운명이다.
인간의 생명을 열면 우주와 같고 닫으면 점으로 된다.
1도에서 360도까지의 문을 열 수가 있는데 누가 많이 여느냐에 따라 생명의 그릇이 정해지는 것이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생명의 문을 닫아 버리면 찰나에 점으로 되어 무와 유가 보이지 않고 또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므로 자신이 사라지는 커다란 죄악을 짓는 것이 된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나 자해를 하는 사람들의 생명은 문을 닫았다 열기를 반복하는 운명이다.
자살의 충동을 느낄 때는 서서히 생명의 문이 닫히는 경우이고 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 때는 닫힌 생명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운명으로 보면 상당히 불행한 사람이고 주위가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생명 상태가 된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이름도 없는 사람이나 죽음의 명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산 사람들의 말이다.
자살의 명분을 논하기란 어려운 것이고 말썽의 소지도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살이라는 환경과 그 사람의 생명 상태를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불법에서는 마귀의 소행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이다.
자신의 운명과 주위 환경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인연이 만들어지고 죽음의 정당성이 함축적으로 일어나서 다른 방법을 선택할 여유가 사라지고 만다.
자살 전 이미 긴 시간에 걸쳐 고민을 하므로 주위에서 유심히 살펴보면 은연중에 나타난다.
십계의 생명 중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계가 합쳐져서 일어나고 거기에 국토세간과 중생세간이 얽혀지고 이를 바탕으로 오음세간이 막혀 버렸으니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는 무간(無間)을 만들어 버렸으니 생(生)이란 존재할 수가 없어서 0.5초의 찰나에 선택해 버리는 것이다.
자살은 생명적으로 타고난 운명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는 일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저장된 운명이다.
성격, 성질, 성분으로 고착화되어 버린 좁쌀보다 더 작은 먼지와 같은 이물질이 일념의 한쪽에 깊이 박혀 있다.
자신도 모르고 가족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이란 속일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문제이므로 시기가 되면 일어나고 나타나서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자살의 명분은 산 사람이 만들지만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없다.
세세생생의 고통은 자신의 업이 되어 생사 생사에 따라다닌다고는 하지만 불법에서는 영겹에 걸쳐서 대가를 받는데 그 고통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불행의 연속이라는 설명이다.
인간의 생명을 다스린다는 것은 교육도 지식도 법도 아니다.
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도 엄연한 살인이다.
그 죄업을 본인 가지는 것은 둘 다 해당된다.
그러나 헌법으로는 자살과 타살이 다르지만 불법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똑같은 살인 죄목에 해당한다.
불법이 더 상세한 형벌이 되고 운명에 미치는 것이다.
이 것이 업보다.
자살의 충동을 느끼거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만들어진 먼지와 같은 자살의 일념을 버려야 한다.
생명의 일념이 비뚤어지면 이처럼 무서운 생각이 일어난다.
인간이라는 위대한 생명 속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스스로 다스리는 최고의 대선(大善)을 찾아 집어넣어야 비로소 면할 수가 있다.
업보를 잠재울 수는 있어도 벗어나지는 못하는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