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인간 교육의 정상이 정의다.
정의는 양심에 따라 나타나므로 양심이 곧 정의라는 표헌이 틀린 것은 아니다.
찰나에 정해지는 양심과 비양심의 차이만큼 인간은 괴롭다.
양심을 팔아먹었다는 말도 있지만 양심을 속이면 마음이 괴로워 잠을 설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이러한 본질도 심장에 털이 난 사람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미제 사건이 아직도 많다.
대구 성서 개구리 소년의 실종 사건은 20여 년이 넘어도 아무도 모르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어린이 5명이 실종된 일이면 어느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무심한 하늘만 부모들은 바라보고 잇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본인이 알고 있는 문제를 정의와 부정으로 대비를 하면 그 사람의 인품과 그릇이 나타나게 된다.
이불 밑에서 만세를 부른 사람과 죽을 각오로 만세를 부른 사람의 마음에 남는 것은 오직 양심뿐이다.
역사가 바르게 되고 세상이 정의로워진 것은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충신은 자존심으로 충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양심이 절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간신은 스스로의 양심을 팔아 이익을 얻는 무리들이다.
교육을 말할 때 복잡하게 여러 가지로 정책을 펼치고 역사교육을 놓고 된다, 안 된다 싸우고 있지만 정의를 가르치기에는 부족한 교육 현장이 지금이다.
지식보다는 살아 있는 양심을 가르치는 것이 인간다운 교육일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강조하고 조명하는 것은 바르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이 교훈을 소홀히 하면 성장은 있을 수 없다.
교육의 이념이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갈 것이며 그 이익이 국가 발전에 원동력이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모두가 헷갈리는 우왕좌왕의 모습뿐이다.
양심의 성장은 인간의 성장과는 다르다.
자식을 키룰 때 비양심, 비상식의 자식으로 키우지 말고 양심과 상식이 풍부한 자식으로 키우는 것이 정의감을 가지는 자식이 된다.
정의는 인간이 갖는 최고의 지혜다.
그래서 '사즉생 생즉사'라 말하고 있다.
정글의 법칙도 정의에 속하고 동물의 세게에도 정의가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정의의 스승이고 양심과 상식의 부모다.
징징 짜는 인간이 되면 고자질이나 역적의 무리들과 휩쓸리기 십상이다.
하지 마라. 그러지 마라가 아니라 왜 하지 말아야 되는지 왜 그러면 안 되는지를 확실하게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머리만 무거운 인간만 존재하면 사회는 정의가 사라지고 없다.
외국 유명 대학 법대 늙은 교수의 탄식이 '머리 좋은 놈은 모두 교도소에 가버렸다. '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실이다.
정의와 행복은 비례하는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