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양심을 팔지 말라는 것이 지혜다.
우주 만물이 가지고 있는 이치에는 선과 악이라는 거대한 산맥인 양심이 자리를 잡고 잇다.
공자는 윤리의 인간을 만들기 위하여 석가는 세상 이치를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는 주위를 돌아보는 사랑을 가르치기 위하여 존재하였다.
부정과 타협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니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갈릴레오는 1633년에 교황청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고 앞으로 '이단의 의혹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말이나 글로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굴욕적인 맹세를 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약 23시간 56분을 주기로 지구는 자전을 하며 지구가 자전을 하는 동안 공전을 함으로써 4분 정도 더 돌아야 태양이 남중하는 것과 맞춘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는 약 23.5도 기울어져서 자전을 한다는 것을 갈릴레오는 몰랐을 것이다.
정의의 반대가 부정인데 굳이 부정부패와 맞물리는 해석보다는 양심과 타협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윤리도덕이나 준법정신도 들어 있고 넓은 의미의 해석으로는 생명의 선악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작은 잘못을 할 때 그냥 넘어가 버리면 습관이 되고 이것이 성장한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쉬운 방법을 찾는 불법적 타협으로 이어지는 것이 생명의 이치다.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부정과 타협했으면 벼슬자리에 안주하여 버렸을 것이다.
정의가 작게는 개인에게 미치지만 더 큰 목적에 부합하면 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흥망과도 직결된다.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 보릿고개와 타협하지 않은 박정희 대통령 등등 역사는 정의에 대하여 생생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건전한 사회가 이루어지고 따뜻한 사람이 많아지고 행복한 사람이 늘어가는 것에는 분명한 법칙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정의다.
법을 바로 세우는 것도 양심을 바로 세우는 것도 정의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는데 지금도 부정과 타협한 사람들이 등장을 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인간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개인이 하는 일이니 크게 미치지는 않겠지 하고 바라보다가 독재로 또는 국가몰락으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을 이제는 안방에서 바라보고 있진만 촉감이 떨어져서 느끼지를 못하는 것 같다.
싱가포르는 리관유 전 수상에 의해 국가 형태가 바로 잡혔다.
'될 것이다'라는 종교적 개념보다는 '된다.'라는 법적 개념이 훨씬 더 강하다.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가장 큰 경고는 법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공평 대등한 법의 원칙은 모든 상식을 갖추고 있다.
부정과 타협을 잘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떵떵거리는 현실을 사람들이 바라보고 하는 말이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왜 더 잘 살아?' 갠인적으로 국가 지도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정과 타협한 국가나 개인은 그리 멀리 가지를 못했다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비싼 등록금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