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자신을 '믿지 마라'라고 한다면 뭐라 할 것인가? 성진을 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자신을 믿고 싶어 한다.
좀 모자라는 줏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자신만이 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은 상대의 의해서 내가 평가를 받게 된다.
어느 조직이나 직장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안목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신의 기준이 잘못되고 편중되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래도 어려움이 있은 때는 차선을 택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믿는 생각이다.
인사나 책임을 맡길 때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도 되는 지를 심사숙고하라는 의미는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다.
인간이 사는 공식이다.
그런데 이 공식을 무시하고 편향된 안목으로 일을 처리하게 되면 머지않아 그 책임은 본인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게 된다. 나도 실패하고 그 사람도 실패의 잔을 마셔야 한다.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사회나 개인은 이런 실패의 일을 반복하면서도 고치려 들지 않는다.
관습이라고 변명만 하고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부작용의 일을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밑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조차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국가 적폐다.
부정이 이어지는 논리는 단순하다.
다른 울타리에 넘겨주지 않고 같은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만 독식하면 된다.
그래서 수십 년간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비겁한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인간이 사는 환경이다. 승자독식의 법칙인가?
높은 자리에 앉아 20년간 비겁한 자신과 타협하면서 그런 타협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훌륭한 상사로 인정을 받고 능력자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그리고 또 다른 자리에 들어가서 그 습성 그대로 살아간다.
법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통째로 태평양 바다에 던져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습성을 끊지 못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기장마저 엉터리로 쓰고 있는데 선생이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운명이다.
음양이 존재하는 것은 선악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선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인간의 생명을 가르친다는 것은 행불행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나도 자식들도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