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보통 인연이 아닌 필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가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일 것이다.
밑도 끝도 없다.
어찌 보면 원수지간처럼 풀기 어려운 문제가 부모와 자식의 문제가 아닐 은지...,
그렇다고 뚜렷한 해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인 이치로 보면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과거세의 업으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현세에 인연으로 만났다는 말도 있지만 어찌 되었건 난제는 난재이다.
부모를 외형적으로 닮는 것은 유전인자에 의해서 피할 수는 없지만 내면의 세계인 성격이나 그릇도 닮는다고는 보지 낳는다. 어른들 말씀에 "저놈은 영판 아비를 속 빼닮았다"라고는 하나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속까지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속을 썩이는 자식도 있고 말 잘 듣는 자식도 있다.
"저놈은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 있을 거야" 저놈은 어릴 때 한 번도 부모 속을 썩인 일도 없는데 생활이 피지를 않아 마음 졸이는 자식도 있고, 자고 나면 말썽만 피워 동네 부끄러워 다니지 못할 정도로 속을 타게 만드는 자식도 있을 것이다.
얌전한 딸자식이 있는가 하면 동네방네 머슴애는 다 달고 다니며 속을 썩인 딸자식이 효녀가 많다는 것도 듣고 있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동네북처럼 맞고 지내는 사내자식 중에는 유난히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자식들이 꽤나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속이 상할 때 여지없이 그 자식을 두들겨 팬다.
남편에 대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아버지와는 영 딴판의 자식도 있다. 어머니는 화가 날 때마다 그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아비를 닮지 않아서 좋다"라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한다.
속으로 낳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
어찌해야 하나?
이 세상 부모들의 공통된 하소연일 것이다.
어머니들은 모이면 천차만별의 자식을 두고 속을 끓이며 푸념을 한다.
남의 자식이 잘되는 것을 보면 부럽기가 한이 없지만 매양 남의 자식만 쳐다볼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식의 진짜 모습을 볼 수가 없는 우리의 부모.
욕심이 앞을 가려 진정한 자식의 그릇을 보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맹모삼천지교를 아무리 떠든다고 한들 자식의 기운을 모르는데 무슨 뾰쪽한 수가 생기겠는가?
이조시대에는 글을 읽지 않으면 사람 구실도 하지 못했다.
직업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직장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양반이라도 서당에 안 다니고 글을 배우지 않으면 시장판에서 먹고살 궁리를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그 시절에도 사람의 기와 운은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그릇도 있었다.
자식을 키운 부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따라가기 어려운 사연도 많다.
헌신적인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 부모의 이야기는 감동이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감명 깊다.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였다.
현명한 어머니는 자식의 그릇을 안다.
자식의 그릇을 최고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최고의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 옛 어머니들의 지혜었던 것이다.
무엇을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없는 세상에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더 훌륭한 부모일 것이다.
돈만 있으면 학원에 보내고 이 과목 저 과목 과외만 시킨다고 자식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자식은 자식의 꿈을 펼칠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공부 못하는 자식이 실패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 많이 한 자식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식이라는 무형의 자산이다.
자식이라는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부모의 역할이 나타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회수하지 못할 투자와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
잘 못하면 자식을 부도로 몰아가게 되고 공황상태로까지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묻지 마 투자보다는 평생 회수가 가능한 안전모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부모아 자식을 위한 좋은 길이다.
부모 자식의 문제.
높으면 높을수록 낮으면 낮을수록 고민이다.
자식은 보모의 명품이다.
세상 어떤 명품이 가치가 있다 해도 자식보다 더 크겠는가?
이 우주를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명품.
부모는 이 명품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영원한 종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리고 부모는 죽어서 다시 자식의 자손으로 태어나니 이것이 필연이 아니겠는가?
부모는 살아서도 부모고 죽어서도 부모다.
미신의 세계에서는 죽은 조상이나 부모 때문에 자식이나 자손이 불행하다고 하여 굿을 한다.
그러나 불법이 있는 법화경의 세계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죽어서 자식이나 자손에게 해를 끼치는 조상이나 부모가 없다는 것이 법화경 이야기이며 일념삼천의 법문이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모르고 있으니 죽은 조상이나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
많이 잘못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