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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의 행복/책과의 행복한 만남

7. 열 가지의 성질 성품(3) ( 제7장 인생유전人生流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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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9. 너그러운 자비의 마음 -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대승의 사람을 말한다. 

                                           타인을 위한 공경심이 높은 곳에 있다.  

  오지에서의 봉사나 전쟁터에서의 간호를 하는 사람, 먹을 것을 구하여 굶주림을 벗어나게 하는 사람, 아픈 사람을 위하여 약을 주는 사람, 경주 최 부잣집에서는 흉년이 들면 곡식을 풀어 근방 100리 안에는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문의 내림이 있었다.

 

  퍼주어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 김치를 담을 때 한 포기라도 더 담아서 옆집 할머니를 주는 사람, 항상 주위를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인색하지 않은 보살과 같다고 했다. 

천사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명이 길지 못한 사람이 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을 잡아가는 염라대왕을 원망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가난한 사람도 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도 있다.

 

  대개 기가 약하게 보이고 마음이 여린 것이 탈이다. 

주위에서는 불행한 운명으로 보지만 그러나 자식은 잘 된다. 

부모가 닦은 선행이 복이 되어 자식들은 괜찮다.

 

   종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는 몰라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한다. 

맹신 광신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도 많다.

 

   국밥집에 가면 국물이 철철 넘치게 퍼주는 할머니가 있다. 

그리고 밥을 더 넣어주기도 한다. 

많이 먹으라고.... 그게 보살의 마음이고 천사의 마음이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세상이 사람 사는 정으로 가득 차야 부처님도 예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밴댕이 속을 가진 스님이나 신부나 목사를 바라보면 속에 천불이 나는데 그런 운명으로 받는 것이 좋지 못한 건강이다.

 

  순수한 종교의 신앙생활은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 원리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안정되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그러므로 인체 면역력이 올라간다. 

오장육부가 편안하니 더 이상의 걱정이 없을 정도가 된다.

 

  신앙이란 인간의 정신력을 강하게 하여 모든 면에서 긍정적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사고방식의 변화는 단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게 된다.

 

  보살은 마음이나 천사의 마음이나 종교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고 또 정신과 마음의 세계를 통틀어 풀어서 설명한 교리는 불교의 불법밖에 없으므로 인용하여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

 

  종교를 반목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에 관한 문제 이므로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일체중생을 우주와 같이 생각을 하고 존경하는 수행의 자세에서 불과를 얻는 대표적인 보살이 불경보살이다.

  불경보살은 장목와석으로 경멸하고 박해를 해도 '나는 깊이 그대들을 존경하며 , 절대로 경만(輕慢)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해서 응당 작불(作佛)함을 얻으리라'라며 수행에 면려했다고 한다.

 

  자신을 경멸한 사람들에게 미운 마음 없이 중생이 성불을 기원하는 보살의 정신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근본이 될 것이다.

 

  석존이 부처가 된 것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시성정각(始成正覺) 한 것이 아니라 과거세 보살의 도를 행하여 부처가 되었다는 법화경의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 나는 본래 보살의 도를 행했는데.... 그때에 이룬 수명은 지금도 다 하지 않았으며 라는 경문이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부처라는 불성의 씨앗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논해 보기로 하겠다. 

부처, 최고의 경지를 불계라고 하지만 불계의 생명은 부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존재한다는 부처와 중생의 불이(不二)라는 평등의 사상이 불법이다.

 

  부처와 중생이 떨어진 별개가 아니고 중생이 부처를 맹목으로 따르는 행위는 더더욱 아니며 중생도 부처와 같은 생명상태가 될 수가 있다는 사상과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불법철학의 위대함이라고 볼 수 있다.

  정해진 날짜에 기도하는 불법이 아니라 만 중생이 부처의 생명으로 돌아가 살기 좋은 우주를 만드는 것이 부처의 근본 뜻이기도 하다.

 

  법화경방편품 제2에 석존은 제자들에게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고 말했다. 

'나와 같이 동등하게 하여 다름이 없게 할 것이다.' 중생을 위하는 부처의 마음이 엿보이는 구절이다. 

석존도 인간이고 예수그리스도 인간이다.

 

  부처가 되라는 것과 천당에 가라는 뜻이 다를 수 없으며 극락과 천당의 표현은 살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석존과 같은 사람, 예수와 같은 사람이 많으면 이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종교가 타락하고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교리로 신격화하는 데 있다. 

불교도 천주교도 그리스도교도 신격화의 대상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의 대상은 우주 허공에 있다. 

이 허공에서 각자 무엇을 찾느냐 하는 것이 종교이고 신앙이다.

 

  10. 허공의 마음 - 인간이 살아가는 이 우주의 허공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불교에서는 생명상태의 최고의 위치인 불계. 

완전하고 절대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의 경지를 말한다.

 

   지옥의 마음부터 보살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구계의 중생도 불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끊임없이 불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주를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떤 논리가 들어있고 숨어 있을까? 

이런 의문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숙제다.

처음 어디에서 나왔으며 어디로 가서 끝나는 우주인지 인간의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우주다.

 

  이런 우주와 같은 그릇을 가르친 것이 종교라면 분명 이 우주에는 종교의 명분이 존재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야 종교가 가르치는 성인의 뜻을 알 수 있으며 인간은 어떤 자세로 우주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부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극락은 어디에 있으며 천당은 어디에 있는가? 

저승은 어디에 있으며 지옥은 또 어디에 있는가? 

마귀는 어디에 있으며 잡신은 어디에 있는가?

 

  복은 어디에 있으며 재수는 어디에 있는가? 

공덕은 어디에 있으며 벌은 또 어디에 존재하는가? 

부처님이시여,  주여, 하나님이시여, 그 많은 불보살은 어디에 있으며 제천은 어디에 있고 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우주와 같은 마음을 가진 성인의 존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절에서는 불상을 바라보고 예배당에서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부르짖는 인간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지옥과 극락을 말하는 불교,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그리스도교의 외침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바라보아도 인간은 죽으면 육신이 없어지는데 어찌하여 몇천 년 전에 죽은 석존과 예수를 바라보며 인간은 왜 이토록 간절하게 절규를 하는 것일까? 

메아리 없는 허공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미묘하고 불가사의하다.

 

  우주를 생명에 접어 넣은 사람을 성인이라 한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죽을 때까지 싸워도 답이 없다. 

대우주를 가리켜 넓은 의미의 허공이라 하면 그 허공 속에 들어있는 각각의 개체나 형상 그리고 인간의 갈구하는 무형의 신앙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작용은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떤 의미인가? 

그냥 불쌍한 것이 인간인가? 

참 불 싸하다? 

누가? 

성인인가?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곳이 땅이다. 

사람의 키보다 더 낮다. 

땅에 붙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다. 

이 의미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는 신앙자가 되라는 뜻일 것이다. 

무엇보다 더 위험한 것이 사자도 호랑이도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성인은 알았기 때문이다.

 

  신앙의 대상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종교 지도자이기 때문에 스님이나 목사나 신부들이 주장하는 부처나 신의 존재는 보통의 인간이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 차이가 있게 말하므로 인간은 스스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님이나 목사나 신부를 보면 부처님같이 하나님같이 존경하며 따르는 것이다. 

가르치는 손가락만 바라보고 믿는 대상을 아는 것이다. 

아! 부처님은 이 절의 불당에 있으면서 공덕을 주시는구나. 

아! 하나님은 이런 큰 교회 십자가에 있으면서 천당으로 인도하는구나. 

이것이 현실이다.

 

  맹종과 맹신. 

광신에 이르는 인간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황량한 벌판과 같다. 

풍파에 시달리며 바람 부는 곳으로 넘어지고 자빠지고 한다. 

이러면 높은 사람들은 신앙심이 부족하여 그렇다고 말한다. 

신앙심의 기준은 무엇인가?

 

  3천 년 전, 2천 년 전에 죽은 성인을 믿는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픈 사람이 낫고 가난한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신앙심인가? 

 

  종교가 요행을 바라게 하는 위치에 있다면 아주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종교다. 

타락의 원인을 제공하며 불행의 종착지를 만드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석존도 예수도 인간이다. 

이런 성인을 닮아 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석존께서 주장한 대우주 여래, 예수께서 주장한 한 님은 허공에 주(住)하고 있다. 

인간과 같이 우주에 존재한다. 

무엇이?

그 정신이....,

 

  불법을 설한 석존의 구극(究국極)의 목적은 불계의 생명을 갖춘 사람이 많을수록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고뇌가 적어지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우주가 되면 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이라고 하여 중생이 사바세계에서 즐기며 논다는 뜻이 맞을 것이다.

 

  현대를 불확실의 세계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불확실은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환경의 문제라든지  전쟁의 문제로 않은 동. 식물이 고통을 받고 있다. 

종교로 인한 갈등과 부조화도 인간을 고통으로 만들고 있다.

 

  불계라는 인간 존극(尊極)의 경애(境涯).

우주의 삼라만상이 부처로 가득 찬 우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예수께서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천사와 같은 사람이 많을수록 인간 사회는 풍요롭다. 

전쟁이 없는 지구촌, 고통받는 인간이 없어지는 지구를 만들자. 

지금도 성인의 정신은 우주의 허공에 머물고 있다.

 

  우주를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잘 났니 못났니 하면서 단군상의 두상을 자르거나 불당 앞에서 오줌 누는 행동은 이제 그만하자. 

서로가 싸우면 성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와 같다.

 

  성인 같은 사람은 상대를 항상 존경한다. 

성인의 그림자를 밟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뿐이다. 

가장 못난 사람이 종교로 경문 한 구절로 싸우는 것이다. 

극락도 천당도 지옥도 찰나에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것이 정신세계의 마음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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