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자신의 문제부터 알아야
옛날, 글만 읽는 가난한 선비 집안의 아낙네의 이야기다.
남편의 직업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책만 읽고 있으니 아낙이 동네에 나가 삯바느질 일이나 농사일을 거들어 주고 양식을 대신 갖고 온다.
하루는 비가 올 것 같아 남편에게 비가 오면 마당에 말리는 조를 거두라고 신신부탁을 하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부탁은 하였지만 걱정이 되어 집에 와 보니 아뿔싸 개구멍으로 조가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고생하여 받은 것도 억울하지만 무심한 남편이 더 미워서 당장 보따리를 쌌다.
다시는 너 같은 놈을 상종하지 않겠다고 집을 나가버렸다.
세월이 흘러 여인은 재가를 하였다.
하루는 나팔소리가 들리고 고을 원님의 행차가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원님을 보러 나왔는데 여인도 궁금하여 사람들 틈에 섞여 지나가는 행렬을 바라보는 순간 원님은 다름이 아닌 전 남편이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지난 세월이 너무나 힘에 겨워 "여보"라고 불러 보았으나 원님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 냥 지나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혼은 사별보다 인연은 길지만 처음부터 너무 기운 혼사를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다.
원인이 잘못되었는데 결과가 잘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이별의 아픔을 안고 태어났으니 결과도 이별로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 이치는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법칙일 것이다.
밥 먹듯이 이혼하고 재혼을 하는 세상이니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겠는가마는 "이혼"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로 파혼을 맞는 것에 대하여 부부 서로가 심도 있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자식이 없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자식을 둔 가정은 몇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인가?
결손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훗날 부모와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왜 그런지는 인과이법이다.
지금은 부부 서로 간에 부정에 대한 문제가 더 심각하기 때문에 세태를 탓해야 할지 아니면 사람을 탓해야 할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더욱이 황혼 이혼이 아니라 대학 이혼이라고 해서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면 이혼을 한다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그동안 자기 계발을 못했으니 이혼을 하고,
자신을 찾는다는 이유를 들어보면 맞는 말인지 아니면 무슨 뜻인지 분간이 안 간다.
심지어 아버지가 평생 이루어 놓은 재산을 자식이 좀 달라고 해도 주지를 않으니 어머니를 꼬드겨 이혼을 하게 만들어서 어머니 앞으로 돌아오는 재산을 자식들이 나누어 가진다는 기막힌 일도 있는 모양이다.
황혼 이혼이 본인들의 의지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던지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자식을 폐인으로 만들려면 서방질하라고 했다.
시대가 그런 시대이니 이해하라는 것도 어느 정도다.
이해할 것을 이해해야지 잘못된 역행도 시대가 그러니까 이해해야 한다면 차라리 한 지붕 아래 두 서방 세 서방을 두는 것이 편하지 않은가?
그리고 두 마누라 세 마누라를 두는 것도 부담도 덜고 훨씬 경제적이 아닌가?
돌아서면 이혼한 사람이고 이혼한 집이라면 이는 인륜의 문제이기 이전에 장차 내가 뿌린 씨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가 더 큰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닌가?
사람은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다.
자기가 벌어 자기가 쓰는데 뭐라 하겠는가마는 오늘도 나의 의식주 생활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땀을 흘리는 가를 생각한다면 건방진 마음이 부끄러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혼은 어느 한쪽의 잘못 보다는 둘 다 똑같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답이다.
절대로 부인이 잘못하고 남편이 잘못하고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격상의 문제도 그렇고 성적인 문제에서도 그렇다.
내가 피곤하면 상대도 피곤하다.
내가 귀찮으면 상대도 귀찮다.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남편의 생각이 부인의 생각일 수 없고, 부인의 생각이 남편의 생각일 수 없다.
그런데 내 생각을 이해해 주지 못하면 무조건 상대의 잘못으로 밀어붙이고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돌아서면 눈에 보이는데 마음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다고 사고방식이 옛날처럼 지조를 지키라는 세상도 아니고 팔자라고 해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는데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물론 생명적으로 낮은 계의 사람은 제아무리 비단옷을 입혀도 맵시가 안 나는 사람이 있다.
100명 중 둘셋 정도가 그렇다고 한다.
이 둘셋이 사회의 풍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활문화와 사회풍조 그리고 무절제의 사고방식이 사람들을 호기심에 빠지게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되어 버린 지금의 세태에 아무리 군자를 논하고 사임당을 논한다고 해서 막힌 귓구멍이 뚫리지는 않겠지만 답답하여 한소리 해보는 것이다.
이혼한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가 잘못하여 이혼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혼도 운명이다.
운명이 탁한 사람은 자식도 대물림하는 이혼도 많다.
이혼하기 전에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만 가져도 이혼자의 절반 이상은 막을 수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이혼을 행동이 자유로울 수는 있어도 정신마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다면 자식을 위하여 고려하는 것도 옳다.
이혼이 능사는 아니다.
차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