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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의 행복/책과의 행복한 만남

8. 남을 배려하는 자세 (불가능의 운명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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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을 여는 0.5초의 비밀을 읽고서

저자 : 덕명 채장식

 

 

  부모 없는 자식이 없고 스승 없는 제자가 없고 국가 없는 국민이 없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은 인간을 위하며 살다 죽는 것이 생사의 이치다.

 

  인간으로 태어난 당연한 도리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맹목의 사람들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시대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먹고살기 위하여 돈을 번다는 의미를 두고도 많은 이해가 다르지만 이런 논리를 생각하면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의미를 모르고 있다. 

수많은 직업과 직장이 존재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하는 결과는 자신에게는 수입으로 돌아오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정보와 이익이 되고 풍요로운 삶이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웬 참견이냐?' 이게 맞는 말인가?

 

  그 수입은 누가 주며 그 일을 하게 만든 정보나 기술은 어디서 배우고 가지고 온 것인가? 

어느 누구나 지식이나 기술 없이는 수입이 늘어나지 않는다.

 

  단순노동의 대가도 고마운 일인데 연봉 5천 이상 받는 사람들이 고마운 줄 모른다면 이해타산을 떠나 수전노에 불과한 이기주의 표본일 뿐이다.

 

  이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철밥통에서부터 좋다는 직장의 노조는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이고도 양에 차지를 않아 경기 흐름도 외면하고 이익을 더 챙기기 위하여 파업을 일삼고 있다.

 

  노동의 유연성을 만들기 위하여 파견근로법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제도로 악용되어  버리고 말았다.

 

  법이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제도나 조직 문화에 빠져들면 자신밖에 모르는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어 사회 구성원들의 아픈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이 생명의 이치가 되는데 아귀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생명의 흐름이 아주 무섭게 변한다.

 

  배려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고 이제는 그 기득권에 안주한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수가 없는 철용성이 되고 말았다. 

좋은 자리를 차지한 그들만의  잔치가 이어질 뿐이다.

 

  물론 법으로 공동의 이익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반을 나누어주는 배려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국가 예산으로 잔치를 하고 줄여보자는 의견에는 반대를 하고 빚으로 빚잔치를 해도 손쓸 수 없다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국가가 부도가 나고 망하는 방법뿐이다. 

그리고 기업체도 마찬가지다.

 

  이런 위험한 길을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지만 모두가 손을 놓고 있다. 

그러면 자손들에게 빚을 물려주는 조상이 되는데 이들에게는 무슨 의미로 다가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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